본문 바로가기

Buddhism

방편方便

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온갖 번뇌 씻어내어 고해의 바다 건너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속히 깨달음의 방편문을 증득하게 하여지이다
내게 있는 아주 작은 티끌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번뇌와 고통이 물로 씻겨 없어지듯 단번에 사라지면 그것이 곧 중생들의 세계인 고해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더 나아가 깨달음까지도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방편方便

 

방편이란 말은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중생들에게 불법을 이해시키고 깨달음에 도달하게 하기위한 기발하고 그럴듯한 방법을 말합니다. 또한 그 방법이 중생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절대선(絶對善)이어야 방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원효스님이나무아미타불을 노래하듯 입에 달고 다닌 것이 대표적입니다. 문자를 모르는 중생도, 불법을 모르는 중생도, 아미타불의 의미를 모르는 중생도, 노는 입에아미타불만 부르면 된다 이것입니다. 비렁뱅이들과는 동냥 바가지를 두드리며, 장터에서는 덩실덩실 춤추고 주막에서는 막걸리를 마시며 외치는나무아미타불’, 이보다 더 장엄하고 거룩한 아미타불 염불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요즘은 절에서 돈을 만들기 위해 적당히 정법(正法)에서 벗어나는 일까지도 방편이라고 둘러댑니다. 심지어 절에서 점을 봐주고 부적 써주는 일도 방편이라고 둘러대는 스님도 있습니다.

 

제가 <천수경>을 해설 한다며 난데없이 음악이나 영화 등 불교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예를 드는 것도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또 인터넷 세존사이트를 운영하며 매일 불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방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불어용어의 올바른 이해를 돕는 정도로 시작하였다가 6년 정도 지난 지금은 이런 논제를 제기하고 토론을 유도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논재들입니다.

연기==중도' 는 성립하는가?

깨달음은 곧 성불인가?

보살은 중생에 가까운가, 부처에 가까운가?

불교의을 기독교의하나님의 뜻으로 대치하면 달라질 것은 무엇인가?

 

이런 내용들이무명과 깨달음의 차이는 무엇인가?’와 더불어 실제로 논의 된 것들인데, 처음에는 회원들이 당황하고 난감해했지만 이제는 토론이 잘 이루어집니다.

 

이런 난감해 보이는 논제를 내는 것도 불자들에게 공부를 시키는 방편입니다. 어렵다고 여기거나 당연한 말 이라 생각하면 공부가 늘지를 않습니다. 논제에 대한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서 회원들은 스스로 이런저런 문제를 내면으로 혼자 확인하고 답을 도출해 내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올린 글을 읽으며, 때론 나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구나 실감함으로써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습니다. 더욱이 토론을 하려면 상대를 이해시키고 본인 스스로 생각을 정제해야 하는 과정이 필수적인데, 이것은 단순히 말장난이나 지식의 자랑 가지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히 불교 공부가 성숙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인터넷상이라 하더라도 단순한 불교 교리 공부가 아닌 마음의 수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마음을 조절하는 이 단계를 넘지 못하고, 상대가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거나 일방적인 주장으로만 일관하다가는 다른 회원들의 날카로운 지적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은 제 풀에 꺾여 논의에 제대로 동참할 수 없습니다.

 

이러니 저도 컴퓨터와 인터넷에 많은 부분을 의지하는 현대인에게 절에는 가지 못하더라도 언제든 접속만 하면 인터넷 법회에 참석하여 바른 불법을 접할 수 있게 하는 꽤 괜찮은 방편을 사용하는 셈입니다.

 

주제 넘는 말씀은 여기서 접고 <법화경>에서 보여주는 부처님의 오리지널 방편을 소개하겠습니다. <법화경> 3대 비유와 방편을 거론할 때는 <법화경> 4 ‘신해품(信解品)’의 내용이 대표적으로 인용되는데, 이와 유사한 내용이 성경에도 있다고 하여 더욱 관심을 끕니다. 조금 긴 느낌은 들지만 중간에 끊을 수 있는 내용이 없어 그대로 우리말로 해석하여 현대식으로 옮겨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버리고 가출하여, 외지를 전전하길 10, 20년에, 50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늙고 곤궁하기 짝이 없어 사방으로 구걸하며 다니다 우연히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간 그의 아버지는 가출한 아들을 찾아다니다 만나지 못하고 그만 어느 도시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부자가 되어 재물이 무척 많았는데 금, , 유리, 산호, 호박, 파리, 진주 들이 창고마다 가득 찼으며, 노비, 상노, 청지기, 관리인들을 거느리고 코끼리, , 수레, , 양들이 헤아릴 수 없으며, 곡식등을 팔고 사는 사업이 인근 나라에 까지 이르러 장사꾼와 중개인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마침 그 때 가출하여 거지가 다된 아들이 이 마을 저 마을, 이 도시 저 도시를 지나다가, 마침내 아버지가 살고 있는 도시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는 그 동안 항상 아들을 생각하길, 아들을 이별한 지가 벌써 50년이 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고 마음속으로 한탄하길, ‘내가 이토록 늙었는데, 재산은 많아서 금, 은 등 보배는 창고에 가득하나 자손이 없으니, 내가 죽을 때 유산을 물려 줄 사람이 없어 재산이 물거품이 되겠구나. 더욱더 헤어진 아들이 간절해지는구나또 생각하길, ‘내가 만약 아들을 만나게 되어 재산을 물려줄 수만 있다면 모든 근심 없어지고 행복할 텐데...’ 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때에 거지꼴이 다된 아들은 품을 팔며 이리저리 다니다 드디어 아버지가 사는 집 대문 가까이에 이르렀습니다. 멀리서 문 안쪽의 아버지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사자좌에 앉아서 보배로 만든 받침에 발을 올려놓고 바라문(婆羅門)과 찰제리(刹帝利)와 거사(居士)들이 공경하여 둘러 앉아있고, 무척 호화롭고 값비싼 진주와 보석 등으로 몸을 치장하였고, 관리인과 하인들이 하얀 불자(拂子)를 들고 좌우에서 보필하며, 보배 휘장을 두르고 꽃 번()을 드리웠고, 향수를 땅에 뿌리고, 갖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해 놓고, 보물들을 벌여 놓고 내주고 받아들이는 등 매우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이 위엄과 덕이 넘쳐 대단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아들은 아버지가 큰 권력과 재산을 갖고 있는데 압도당해 곧 두려워져서 그 자리에 온 것을 후회하면서 혼자 이렇게 생각 하였습니다.

 

‘저 분은 필경 왕이거나 혹은 왕과 대등한 분이신가 보다. 나 같은 처지에 품을 팔아 돈을 달라고 할 데가 못 된다. 다른 조그만 도시에서 마음대로 품을 팔아 의식을 해결해야 할 것 같다. 행여라도 여기 오래 있다가 공연히 이 집에 붙들려 강제로 일을 시킬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생각에 겁이나 당장 그 곳을 떠났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사자좌에서 이미 그가 아들인 줄 알아채고 매우 기뻐서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내 창고에 가득한 재산을 이제 물려 줄 데가 있구나. 내가 이 아들을 항상 생각하면서도 만날 수 없었지만, 이제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났으니 나의 소원을 이루게 되었구나. 내가 비록 늙었으나, 아들에 사무치는 마음은 변함이 없도다.’

 

당장 사람을 보내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하인이 아들에게 다가가서 붙드니, 이에 궁색한 아들은 놀라서 기겁하며 말하길나는 아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어찌 잡으십니까.’하며 도망가려 하니 하인은 더 급하게 붙들고 억지로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이 때, 아들은 생각하기를죄 없이 붙잡혀 가게 되니 이거 죽게 되는가 보다라고 생각하여 너무나 놀라 땅에 누워 기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하인에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내겐 필요 없으니 강제로 데려오지 말고, 찬물이나 얼굴에 부어 정신 차리게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

 

아버지는 비록 자신의 아들이지만 그 마음의 용렬함을 눈치챘고, 자기의 부귀가 오히려 아들에겐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기의 아들이 분명하지만 수승한 방편으로 자기의 아들이란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인이 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래, 너를 잡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거라

 

궁색한 아들은 다행이라 여기고 기뻐하며 땅에서 일어나 가난한 도시로 가서 밥벌이를 하였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그 아들을 안심하게 하여 데려오려고 한 방편을 생각하였는데, 모습이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두 사람을 은밀히 보내면서 이렇게 일렀습니다.

 

“너희들은 그 사람에게 가서, 저기 품 팔 곳이 있는데 품값은 다른 곳의 두 배를 준다고 하거라. 그래서 그가 좋다고 하면 데려오되, 무슨 일을 시킬 것이냐고 묻거든, 거름을 치는 일인데 우리도 함께 일 한다고 하거라

 

그 두 사람은 궁색한 아들을 찾아가서 아버지가 당부한 그대로 말하였고 아들도 수긍하여, 궁색한 아들은 드디어 아버지의 집에서 삯부터 먼저 받고 거름을 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일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방 안에서 창 밖을 보니, 아들의 몸은 야위어 초췌하고, 먼지와 거름이 몸에 가득하여 더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귀한 보석과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로 치장한 옷이 아닌, 아들과 같이 때가 묻고 허름한 옷으로 갈아입고 일부러 흙을 몸에 묻히고, 오른손에 거름 치는 도구를 들고 조심스레 일꾼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름을 피우지 마라. 그대는 이 집에서만 일하고 다른 곳에는 가지 마라. 품삯도 차차 올려 줄 것이고, 지내기에 필요한 그릇, , 밀가루, 소금, 초 따위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의 많은 하인이 살펴주고, 필요한 것은 요구하는 데로 줄 것이니 안심하고 일만 하거라. 나는 너의 아버지와 같으니, 염려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나는 늙었고 너는 아직 젊었으며, 너는 일할 때에 게으름을 피거나 속이거나 화를 내거나 남을 원망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사람처럼 나쁘지 아니하구나. 이제부터는 내가 낳은 친아들과 같이 생각하겠다.”

 

이렇게 안심시키며 아버지는 그에게 이름을 다시 지어 주고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궁색한 아들은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이 기뻤으나, 마음 속으로는 여전히 자신은 머슴살이 하는 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년 동안을 항상 거름만 치다가 주인인 아버지와는 점점 마음을 서로 알고 믿어서 허물없이 지낼 수 있으면서도, 거처는 역시 본래 있던 곳에서 하는 것을 편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병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할 줄을 이미 알고 궁색한 아들에게 당부하였습니다.

 

“내게는 지금 금·은 등 보배가 많아 창고마다 가득 차 있다. 창고 안에 있는 재물들이 얼마큼인지, 받고 내주는 거래를 이제부터 모두 네가 맡아서 처리하거라. 나의 마음이 이러하니, 너는 내 뜻을 받들어라. 왜냐하면, 이제는 나와 네가 한식구나 다름없이 서로 믿으니, 조심해서 관리하고 소홀히 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하거라.”

 

이 말에 궁색한 아들은 그 당부대로 온갖 금·은 등 보배로 가득한 창고를 관리하게 되었지만, 정직하여 밥 그릇 하나라도 사사로이 가지려는 생각도 안 함은 물론 거처도 역시 본래 쓰던 곳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아직도 용렬한 마음만은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아버지는 아들의 용렬했던 마음이 점점 나아져 큰 뜻을 가지게 되고, 과거의 자신이 크게 부족했음을 반성하는 생각을 갖게 된 사실을 알았습니다. 드디어 아버지는 죽음이 임박하자 아들을 시켜 친척과 국왕과 대신과 찰제리와 거사들을 모이게 하고 이렇게 선언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아이는 실은 내 친 아들이요. 내가 낳아서 길렀는데, 어느 땐가 고향에서 나를 버리고 가출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기를 50여 년이 흘렸습니다. 이 아이의 본관은 아무개이고 내 이름은 아무입니다. 그때 고향에서 근심이 되어 찾느라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뜻밖에 여기서 만났습니다. 이 아이는 진정한 내 아들이고, 나는 이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지금부터는 내가 가졌던 모든 재산이 모두 이 아이의 소유이며, 지난 날 출납하던 일도 앞으로는 모두 아이에게 맡겨서 하게 할 것입니다.”

 

궁색한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크나 큰 교훈을 얻었다고 환희하며나는 본래 이 재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대도 없었는데, 이제 이 엄청난 보배광이 저절로 내 것이 되었도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장자(長子)와 궁자(窮子)의 비유라고 합니다. 부처님[長子]이 어리석은 중생[窮子]을 차근차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고 구제하는 모습에 비유한 것입니다. 이런 기막히게 훌륭한 방법이 <천수경>에서 말하는 방편(方便)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