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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반야般若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자비하신 관음보살님께 귀의하옵니다.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바라오니 속히 지혜의 배에 오르게 해 주소서
관세음보살님께 세우는 다섯 번째 원은, 내가 속히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지혜의 배에 오를 수 있도록 원하는 것입니다.

 

반야般若

<천수경>은 한국의 절에서 불공, 예불 등 거의 모든 의식을 봉행할 때 빠지지 않고 독송되는 경전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초보자들이라도 <천수경>은 <반야심경>과 함께 스님들의 독경을 따라하다 보면 저절로 외우게 되는 경전입니다. 그런 그 내용과 의미를 알고 독송하는 신도들은 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게다가 <천수경> 하면 ‘초보자 경’ 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금강경·법화경·화엄경 같은 대승경전에 비해 그 가치를 얕잡아 보는 경향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천수경>은 초기불교의 사상에서 대승불교와 밀교까지 혼합된, 말 그대로 통불교(通佛敎)의 전형을 보여주는 경입니다. 따라서 <천수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불교의 핵심 사상을 잘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 대목의 반야라는 용어야 말로 <천수경>의 깊이를 확인시켜주는 말입니다. ‘반야심경’, ‘금강반야바라밀경’ 같이 경의 제목에 들어가 있거나 한 권의 경전의 주제가 될 정도로 무게와 깊이가 있는 ‘반야’의 의미를 제 공부 수준으로 어찌 설명드릴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이 두 경전의 해설서를 쓸 수준이 되어야, 그나마 반야에 대한 변죽이라도 울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반야심경>해설서는 출간하였고, <금강경>도 풀이해 책으로 내려고 계획 중이니, 반야에 대해 언급 할 자격이 조금은 있다고 여기며 설명하겠습니다.

반야(般若)란 말도 보살 등과 마찬가지로 산스끄리뜨어 쁘라지냐 혹은 빤냐를 원음에 가깝게 발음되는 한자로 취한 것인데, 이런 표기법을 ‘음사’(音寫) 라고 합니다. 코카콜라를 ‘可口可樂’으로 표기하는 식이 음사입니다. 산스끄리뜨어의 뜻을 바탕으로 반야를 해석하면, 보살의 단계에서 얻어지는 참 지혜를 반야라 할 수 있습니다.

<화엄경>에서는 보살의 수행의 단계를 초지에서 십지까지 열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반야는 최종적으로 십지보살 , 즉 거의 부처의 경지에 이른 보살이 증득하게 되는 지혜를 말합니다. 흔히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불교의 공(空)에 대해 설명한 경전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틀리지는 않습니다만, 그것만으로 두 경전의 성격을 단정 짓기에는 너무 미흡합니다.

<반야심경>은 ‘공’ 이란 말로 가득 차 있지만, 금강경에는 ‘공’이라는 말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만, 지금은 반야에 해당되는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모두 핵심은 반야를 얻기 위한 방법을 설하고 있는 경인 것입니다. 반야를 얻기 위한 공통분모가 바로 ‘공’의 체득(體得)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공(空)의 도리를 체득하는 것이 곧 반야라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야를 얻는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경지이겠습니까?

<천수경>은 절묘하게도 평범한 중생도 이 어려운 반야에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천수경>에서는 ‘원아속승반야선’(願我速乘般若船) 이라고 반야의 배에 오르게 해 달라고, 관세음보살님께 기원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즉 ‘나는 반야에 도달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관세음보살은 반야행 함선을 운영하고 계신데, 그 배에 타면 나도 반야를 증득할 수 있다‘라고 하니 얼마나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까. 더욱이 다음에 바로 나오듯 중생들의 고통의 세계를 고해(苦海 )라고 바다에 비유해 놓았으니, 관세음보살이 중생 구제의 방편으로 대형 함선을 운영하는 것은 너무나도 현명한 일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