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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원적圓寂

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자비하신 관음보살님께 귀의하옵니다.

원아조등원적산願我早登圓寂山
바라오니 속히 적멸의 산에 오를 수 있게 해 주소서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바라는 여덟 번째 원은, 내가 속히 수행이 완성되어 원적(圓寂)이라 이름하는 깨달은 사람만이 오를 수 있는 산에 오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즉, 빨리 깨달음을 이루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원적圓寂

원적은 적멸(寂滅), 열반(涅槃)과 같은 말입니다.

둥글 ‘圓’자가 들어가는 단어 치고 나쁜 뜻으로 쓰이는 말은 거의 없습니다.

<천수경>의 본래 경명은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인데, 여기에도 원만(圓滿)이 들어가 있습니다. 초반에 설명드린 대로 ‘원만’ 역시 매우 긍정적이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원적(圓寂)은 스님들이 돌아가셨을 때, 원적에 드셨다 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죽음을 원적이라고 표현하니, 원적은 허무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그냥 다른 몸을 받는 정도로 인식합니다. 물론 깨달음을 성취한 스님이 죽음을 맞으시면 윤회에서 벗어나니, 당연히 다시 받을 몸 자체도 없게 되는 것이긴 합니다.

이같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경우의 원적을 일컬어 열반과 같은 사실상 깨달음의 궁극의 경지라고 풀이하는 것이 본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꼭 스님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죽으면 예(禮)의 차원에서 높여주는 것이 관례이니, 불교 집안에서 스님의 죽음을 깨달음의 경지를 이룬 ‘원적’에 드셨다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죽음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티베트불교는 현세를 사후를 위해 준비하는 단순한 예비적 삶이라는 관념이 강합니다. 따라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부차적으로 여기며, 성지인 포탈라 궁으로 자벌레 가듯이 일배 일보 하는 순례의 모습은, 그 마음의 근원이 우리의 삼보 일배와는 확실히 달라 보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와 같은 불교인들인데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하게끔 우리의 불교적 삶과 차별화 시키는 것일까? 과연 그것이 수행의 최고의 방법인가? 현세의 삶이 내세를 위한 준비 과정이라는 그들의 불교관은 바른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연쇄적으로 머리를 스쳐 갑니다.

달라이 라마라는 특별한 인물 때문에 밀교가 주류인 티베트불교가 우리에게 조금은 과장되어 알려지거나, 그들의 불교가 때론 우리의 그것보다 더 거룩하다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는 생각도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