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자비하신 관음보살님께 귀의하옵니다. 원아조동법성신願我早同法性身 바라오니 속히 내 몸이 법과 같게 해 주소서 |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바라는 마지막 열 번째 원은, 내 몸 자체가 곧 부처님의 법과 같게 해달라는 것입니다.이 원은 마지막 원답게 나도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관세음보살님께 발원하는 열가지 원은 마치게 됩니다. |
법성신法性身
‘내 몸 자체가 법의 성품을 완성하는 것’이 법성신의 의미인데, 이 말은 내 몸 그대로 부처를 이루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실로 엄청난 선언을 하는 셈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다’라는 말은 불교에서 입이 닳도록 하는 말입니다만, ‘내 몸 자체로 부처를 이루자’는 원(願)을 일으키는 것 자체가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 사상은 앞서 언급 한 바 있는 밀교(密敎 )수행의 최종 목표입니다. 즉심성불(卽心成佛 :마음이 곧 부처)이 아닌 즉신성불(卽身成佛 :몸이 곧 부처)라는 발상은, 대승불교 말기인 7세기 후반에 형성되기 시작한 불교인 밀교의 핵심사상입니다.
<천수경>에 진언과 다라니는 물론 ‘법성신’이 등장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천수경>이 밀교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은 경이라는 증거입니다. 대승불교 후의 밀교와 대승불교의 불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와, 밀교와 대승불교가 혼합된 <천수경>이 만들어진 배경과 그 의도에 의문이 생깁니다. 다른 어떤 경전도 이렇게 다양한 시각으로 구성된 경은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중심을 잡기에 당혹스러운 경이 <천수경>이기도 합니다.
‘밀교가 아닌 현교(顯敎) 불교에서는 <금강경>등을 통해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현재의 몸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밀교에서 주장하듯 부처를 이룰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등의 과제들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쯤 되면 솔직히 말씀드려 답답한 쪽은 여러분이 아니라 저입니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부분을(이 법성신을 밀교적 접근으로 해설한 <천수경> 해설서를 아직 못 찾아서 한번 시도해 봅니다) 오히려 나서서 문제 제기를 해놓고 발을 빼면 도리가 아니고, 그렇다고 거론을 안 하자니 저 자신을 속이는 기분이 들어 답답하고 난감하다는 말씀입니다.
우선 몸 자체의 성불(成佛)에 대한 문제입니다.
밀교의 즉신성불(卽身成佛) 사상과 달리 부처님 당시나 부처님이 입멸(入滅) 하신 후, 한동안 이 부분에 대해 혼란스럽게 여기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석가모니 부처님은 거의 2,500년 전의 실존 인물입니다. 태어난 시기에 대한 논란은 많지만, 80세에 입멸하신 것에 대한 이론(異論)은 없습니다.
입멸 전 석가모니는 ‘나는 몸이 몹시 피곤하다, 눕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경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이 인간적 ‘호소’를 두고 후세의 논사(論師)들은 ‘깨달음을 완성한 정도가 아니라, 몸 자체가 부처님인 당사자가 피곤함을 느끼고 눕고 싶다했으니 그것도 번뇌는 번뇌 아니냐? 그러니 몸이 존재하는 한 완전한 열반은 없는 것이 아니냐?’라는 의문들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육신을 버리기 전의 깨달음, 곧 몸을 여의기 전의 석가모니가 얻은 열반을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 하고, 육신까지 떠날 때(돌아가셨을 때) 비로소 본능적 생리작용의 번뇌도 사라지니, 이를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차별화해서 불렀습니다.
유여열반은 단어 그대로 뭔가 좀 남아있는[有餘] 열반이고, 무여열반이야말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無餘] 열반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는 몸이 곧 법이라는 개념에서의, 법신法身의 실체는 인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법화경>(기원전 100년~기원후 200년에 걸쳐 완성된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방대한 경전)의 제12장 ‘제바달다품’에서는 여자의 몸으로 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그전까지는 어느 경에서든 ‘여자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놓았기 때문입니다.
<법화경>의 이 대목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때, 용녀(龍女)에게 한 보배 구슬이 있으니, 값이 3천 대천세계에 상당하였다. 그것을 부처님께 바치니, 부처님이 곧 받으셨다. 용녀가 지적보살과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내가 보배 구슬 바치는 것을
세존
께서 받으시니, 그 일이 빠르옵니까, 빠르지 않습니까.’
대답하기를 ‘매우 빠르니라.’라고 하였다.
용녀가 말하였다.
‘당신들의 신통한 힘으로 나의 성불하는 것을 보십시오, 그 보다도 더 빠를 것입니다.’
그 때, 여러 모인 이들이 보니, 용녀가 잠깐 동안에 남자로 변하여서 보살의 행을 갖추고, 곧 남방의 무구(無垢)세계에 가서 보배로운 연꽃에 앉아 등정각을 이루고, 32 훌륭한 몸매와 80가지 원만한 모양을 갖추고, 시방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연설하였다.」
정리하자면, 부처님 당시에는 몸 그대로 부처가 되는 성불(成佛)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수백 년이 지난 후대에는 육신 그대로 성불(成佛)을 당연시하기에 이르렀고, 남녀의 구별까지도 없앤 사상으로 발전하였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밀교는 <법화경>보다 적어도 500여 년 후대에 성립이 되니, 이 몸 그대로 부처 이룸[法性身]이 밀교의 독창물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현세의 이 몸으로 부처 이룬다는 <천수경>의 ‘법성신’은 <법화경>이 아니라, 밀교의 영향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앞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이렇게 한 가지는 해결했지만, ‘법의 성품인 법성法性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문제는 이제 설명을 시작해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의상(義湘, 625-702)스님이 방대한 <화엄경>을 210자로 축약해서, ‘법성게法性偈’라 하였는데 그 시작 단어가 ‘법성’(法性)이고, 더욱 ‘법성게’ 자체가 법의 성품을 설명한 내용이니, 저는 안성맞춤으로 인용할 수 있어 아주 좋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가 모두 만족하기는 어려운 법인 것처럼, 여러분들은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하품만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속사정이야 어떻든 법성(불법의 성품)에 대해, 제가 의상스님보다 더 잘 설명을 할 수는 없으니, 의상스님의 친 법문이라 여기시며 찬찬히 그 뜻을 새겨보십시오.
‘법성원흉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 시작되는 게송인데 제가 의역해 보았습니다.
법의 성품은 둥글고 둘이 아니네
모든 법은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어
이름과 모양이 모두 끊어진 자리네
이 경계 지혜로도 매우 알기 어렵네
진실된 참 성품은 깊고도 아주 미묘해
그 이치가 인연 따라 밖으로 나와
하나 속에 모두가, 모두가 다시 하나에
하나가 곧 모두, 다시 모두가 하나이네
한 티끌에 온 우주를 머금었고
다시 낱낱 티끌에도 역시 그러하네
셀 수 없는 시간이 곧 한 생각이며
한 생각 역시 한 없는 시간이네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떨어질 수 없어
그 가운데 서로 섞이지 않는 모습 보이네
믿는 마음 일으킴이 곧 깨달음을 이룸이요
나고 죽음 깨달음이 한 자리에 같이하고
이치와 현상이 서로 구분될 수 없어
이것이 보현보살의 깨달은 경계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계이기도 하네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알 수 없는 기운들
중생위해 쏟아져 허공을 가득 채워
중생들은 원하는바 그 모든 것 성취하네
수행자는 부디 본래 마음자리를 찾아가고
헛된 생각으로 엉뚱한 곳에 가지 마라
미묘한 방편으로 이정표를 삼아서
스스로 부처 이룰 마음자리로 들어가라
없어지지 않는 보배 다라니로써
온 우주를 법당으로 꾸미고
그 법당의 실제인 중도에 머무르면
그것을 옛날부터 부처라 이름 했다네.
역시 어렵습니다.
그래서 절망감과 답답함을 느끼는 분에게 용기와 흥미를 드리기 위해, 북한에서 불교학자들이 번역한 같은 <법성게>를 비교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말 법성게 (북한 사회과학출판사 1992년 발간, 팔만대장경 해제 중)
모든 것의 본성은 원만하게 융합되어 차별이 없나니
모든 것 움직임 없어 본래 고요하여라
이름 없고 모습 없어 분별할 길 없나니
주관과 객관이 다른 것 아니어라
참된 본성 매우 깊고 더없이 미묘하여
본성 없는 것들을 인연으로 나타내네
하나 속에 온갖 것 있고
온갖 것 속에 하나가 있으니
하나가 온갖 것이고 온갖 것이 하나라네
끝없는 시간이 하나의 순간이요
하나의 순간이 끝없는 시간이며
과거가 현재이고 현재가 미래이나
그렇다고 이 구분이 없는 것도 아니라네
깨닫겠다 생각할 때 깨달음을 이루나니
륜회와 열반이 언제나 함께 있고
본체와 현상에 차별이 없나니
부처의 경지이자 보살의 경지라네
해인삼매의 명상속 에서
불가사의한 여의주가 솟아나
온갖 보배를 비처럼 퍼부으니
사람들 저마다 리익을 얻는다
이 때문에 수도자가 근본으로 돌아가려면
허망한 분별을 없애야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 설교를 따를지니
깨달음에로 이끄는 여러 가지 교리라
교리의 무진장한 보배로써
모든 세계를 장엄하게 꾸미고
진실과 중도의 평상에 앉아
언제나 드놀지 않는 자 부처라고 부르네
‘중도에 머무르면 그것을 옛날부터 부처라 이름 했다네’(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라는 법성게의 마지막 부분이 법성신을 이룬 경지를 말합니다. <천수경>에서 말하듯 관세음보살님에게라도 의지하여 법성신을 얻기를 바라는 간절한 원은 여러분이나 저나 마찬가지입니다. 법의 성품인 법성에 대해 감이 안 잡히도록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역시 저나 여러분 마찬가지니 실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법성에 대해 이해가 잘 안 된다 해도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천수경>에서는 관세음보살님이 다 이루어 주신다 했으니, <천수경>을 수지(受持)하면 내가 법의 몸인 법성신(法性身)을 얻게 되는데, 단지 단어의 뜻을 좀 모르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