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약향수라我若向修羅 내가 만약 수라계에 떨어지면 악심자조복惡心自調伏 스스로 악한 마음이 겪여 버리고 |
내가 악업이 많아 죽은 후에 만약에 싸움만 일삼고 시기심 많고 난장판 만들기를 즐기는 수라의 세계에 떨어지면, 내 스스로 악한 마음을 끊어 싸움과 난장판을 부려 아수라장을 만들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
수라修羅
불교에서 유래된 일상어로 만으로도 책 몇 권 엮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말과 불교는 정서적으로 융합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중국에서 순도(順道)라는 스님이 불상과 경전을 가져 온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지금의 김해 지역에 가야국이 있었던 서기 1세기에, 이미 남방을 통해 불교가 수입된 흔적이 있다는 주장입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인 김수로왕(金首露王:?~199)이 인도의 아유타(阿踰陀)라는 지역에서 온 여인과 결혼을 하였는데, 김수로왕의 부인이 된 이 여인이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후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도에서 아유타 라는 공주가 가야로 시집올 때 불교도 같이 수입되었다는 학설입니다.
이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시작된 학설인데, 물고기 문양의 단청 같은 가야불교의 상징이 인도의 아유타국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것 등이 그 증거라고 합니다. 저도 관심있게 이 주장을 추적해 보았는데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 의 내용 중 해당 부분을 소개합니다.
(사학자들은 <삼국유사>가 설화 등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그 내용의 진위(眞僞)에 있어서는 <삼국사기>에 뒤지지 않는다고 평가합니다)
「 건무 24년 무신(48) 7월27일에 구간 등이 왕을 조알할 때 말씀을 올렸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아직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이 기른 처녀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왕비로 삼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왕이 말했다.
“내가 이곳에 내려옴은 하늘의 명령이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로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왕은 드디어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빠른 말을 주어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에 가도록 했다. 문득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빛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바라보며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뛰어왔다. 승점에 있던 신귀간이 이를 바라보고는 대궐로 달려와 왕께 이 사실을 아뢰자 왕은 듣고 매우 기뻐했다. 아내 구간 등을 보내 목련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나는 너희들과 본디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했다. 왕은 그 말을 옳다고 여겨 유사를 데리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에서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었다. 그리고 자기가 입었던 비단 바지는 벗어 산신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또 시종해 온 잉신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보와 조광이었다. 그들의 아내는 모정과 모량이라고 했으며, 또 노비까지 있었는데 모두 합하여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 능라의 옷과 필단, 금은주옥과 구슬로 만든 패물등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이제 왕이 계신 곳에 가까이 이르니 왕은 친히 나아가 맞아 함께 장막궁전으로 들어갔다. 잉신 이하 모든 사람들은 뜰아래에서 뵙고 즉시 물러갔다.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를 안내하라고 말했다.
“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대여섯명씩 있게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도록 했으며, 심지어 옷과 비단과 보화까지 주고는 많은 군인들을 모아 그들을 보호하게 했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에 들자 왕후가 조용히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씨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지난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하늘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이 내려 보내어 왕위에 앉게 했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분이다. 또 새로이 나라를 다스림에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배필이 되게 하라는 말을 마치고 하늘로 올라 가셨다. 꿈을 깨었으나 상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우리와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귀한 과일 종류)를 찾고, 하늘로 가서 번도(3000년에 한 번씩 열리는 복숭아)를 찾아 이제 모양을 가다듬고 감히 용안을 가까이 하게 되었습니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지금도 한 집안으로 여겨 혼인을 금한다고 하니, 종교적 믿음과 관계없이 우리는 이미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는 셈이고, 자연스레 불교의 용어가 일상화되는 현상이 생겨난 것입니다.
<천수경>에서 언급한 수라(修羅) 역시 그런 언어 중 하나입니다. 수라는 아수라(阿修羅)를 줄여 부르는 말인데, 흔히 엉망진창이 되어 버렸을 때 ‘어휴, 수라장이 돼버렸네’의 수라가 <천수경>의 수라와 같은 말입니다.
아수라는 싸움을 좋아해 항상 사고만치는 귀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업을 받는다면 앞에 언급된 지옥이나 아귀 보다는 훨씬 가벼운 과보입니다. <천수경>에서는 바로 다음에 축생의 과보로 이어가는데, 통상적 불교교리 상으로는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 곳을 삼악취(三惡趣) 혹은 삼악도(三惡道)라고 하여 윤회의 세계 중 가장 험악한 곳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천수경>에서는 수라의 과보를 축생의 과보보다 더 나쁜 곳으로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