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취보살正趣菩薩
정취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라고는 하지만, 천수보살이나 관자재보살의 경우와 같이 관세음보살과 동일한 보살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생각해 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정취는 ‘다른 길로 가지 않는다’는 뜻인데, 한 번 세운 원을 향해 오로지 외길 수행으로 일관한다는 뜻으로 무이행보살(無異行菩薩)이라고도 합니다.
정취보살은 <화엄경>의 마지막 품인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만날 때, 스물아홉 번째로 등장합니다. 선재동자가 보살의 길을 어떻게 갈 것인지 묻자, 정취보살이 “선남자여, 나는 보살의 해탈을 얻었으니 이름하여 ‘보문속질행해탈(普門速疾行解脫)’이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보문’(普門)이라는 말과 오로지 중생 구제를 제일의 원으로 삼는다는 것이 관세음보살과 같기에 동일한 보살로도 표현된다고 유추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표적 관음도량인 낙산사(676년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義湘)이 창건)의 주법당인 원통보전에 관세음보살과 정취보살 두 보살을 나란히 모셨다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현재는 낙산사 하면 홍련암과 의상(義湘: 625∼702)이 연상되는데, <삼국유사> 중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낙산의 두 성인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지칭함)편을 소개해드리니, 읽으시며 정취보살과 관세음보살의 동일성과 차이점을 추론해 보시기 바랍니다.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어느 굴속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 곳을 낙산이라 이름했다. 이는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다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의상은 재계한 지 7일 만에 좌구를 새벽 일찍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신장(神將))의 시종들이 그를 굴속으로 안내했다. 의상이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니 의상이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이에 관음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했다.
“좌상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당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
의상이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金堂: 주불을 모신 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모습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대나무는 즉시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인 줄을 알았다. 이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의상은 자기가 받은 두 가지 구슬을 불당에 봉안하고 떠났다.
그 후에 원효가 뒤이어 와서 여기에 예배를 올리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원효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 월경 때 입었던 옷)을 빨고 있었다. 원효가 물을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원효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그를 불러 말했다.
“그대 화상은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문득 숨어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원효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으므로, 그제야 아까 만난 성녀(聖女)가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또 법사가 성굴(聖窟)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그 후에 굴산조사 범일이 태화 연간(827-835)에 당나라에 들어가 명주 개국사에 이르니, 왼쪽 귀가 없어진 한 스님이 여러 대중의 끝자리에 앉아 있더니 조사에게 말했다.
“저도 또한 고향사람입니다. 집은 명주의 경계인 익령현 덕기방에 있습니다. 조사께서 후일 고향에 돌아가시거든 반드시 내 집을 지어주어야 합니다.”
이윽고 조사는 총석(叢席-많은 승려들이 모여 있는 곳)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중국 항주의 염관에 있던 제안선사에게 법을 얻고 회창(會昌:당 무종의 연호, 841-846년) 7년 정묘년(847년)에 본국으로 돌아오자 먼저 굴산사를 세워서 불교를 전했다. 당나라 선종 12년 (858) 2월 보름날 밤 꿈에, 전에 보았던 스님이 창문 너머에 와서 말했다. “지난 날 명주 개국사에서 조사와 약속하여 이미 승낙을 얻었는데, 어찌 이리 늦는 것입니까?”
범일은 놀라 꿈에서 깨어 사람들 수십 명을 데리고 익령 경계로 가 그가 사는 곳을 찾았다. 낙산 아랫마을에 한 여인이 살고 있으므로, 이름을 묻자 덕기라고 했다.
그 여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이 겨우 여덟 살이 되자 마을 남쪽 돌다리 가에 나가 놀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말했다.b
“나와 같이 노는 아이 중에 금빛이 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 말을 범일에게 했다. 범일은 놀라고 기뻐하며 그 아이가 함께 놀았다는 다리 밑으로 갔다.
찾아보니 물속에 돌부처 하나가 있었다. 꺼내보니 왼쪽 귀가 끊어져 있고 전에 만난 스님과 같았다. 이것이 바로 정취보살의 불상이었다.
이에 간자(簡子:점치는 대나무 조각)를 만들어 절을 지을 곳을 점쳐보니 낙산 위가 가장 좋으므로 그 곳에 3칸짜리 불당을 짓고 그 불상을 모셨다. 그 후 백여 년이 지나 들에 불이 나서 이 산까지 번졌으나 오직 관음, 정취 두 성인을 모신 불당만은 그 화재를 면했으며, 나머지는 전부 다 타버렸다.」
이 이야기가 수록된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는 달리 정사(正史)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를 인용하였기에 일연스님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소개하겠습니다.
사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왜곡된 일연스님에 대한 시각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기 때문에, 일연스님에 대해 심지어 요승(妖僧)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합니다. 그러나 최근에 일연스님과 <삼국유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제가 일연스님과 같은 ‘승려’라서 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일연스님은 고려 말 선풍(禪風)을 일으키며 왕에게까지 불법을 설하였고, 1283년에는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고 하니, 이(理)와 사(事)가 자재함은 물론 현실감각과 안목이 뛰어난 스님임이 틀림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출가자인 사문(沙門)들은 그 당시에는 최고의 사상가이자 최고의 현실감각을 지녔으며, 그 실천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인 최고의 엘리트 집단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3,0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악습으로 지속되는 계급제도(카스트: 사제, 왕족, 상인, 천민의 4계급)가 인도 역사상 유일하게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의 승단에서만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간디의 죽음도 이 문제와 연관지을 수 있고, 인도 현대화에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이 계급제도임을 생각한다면,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얼마나 영향력이 막강한 시대의 개혁가인가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일연스님도 이에 못지않은 시대의 선각자라 할 수 있습니다.
정취보살을 설명하다 일연스님으로 말이 넘어와 버렸지만, 지금의 스님들은 같은 부처님 제자임에도 왜 이리 무기력하고 사명감이 없는지 한탄스러워, 제 마음이 이리로 흘러 버렸습니다.
어쨌든 <삼국유사>의 내용에 의하면 정취보살은 관세음보살과는 다른 보살이라는 사실은 전달된 것으로 알고 마무리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