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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나무 관자재보살 마하살 南無 觀自在菩薩 摩訶薩
관자재보살님께 귀의합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관자재보살 역시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렇게 간단히 설명을 해도 제게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서론 부분에서 관세음보살을 설명할 때 언급했었지만, 여러분들을 <천수경> 박사는 아니더라도 관세음보살이나 관자재보살에 관해서 만큼은 박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가능하면 좀 다른 각도에서 체감할 수 있게 재차 설명을 드립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으로 가장 널리 쓰여지는 이름입니다. 경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보살도 역시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런데 경전에서도 ‘관세음보살’로 등장 할 때와, ‘관자재보살’로 표현할 때에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 중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로 등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로 이름합니다.

이것은 경전이 편찬될 때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라, 경전에 분명히 의도하는 바가 있어 관세음 또는 관자재로 구별하여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중생을 제도하는 구제보살로 등장할 때는 관세음보살이라 칭하고, 수행을 닦아가거나 이미 완성한 보살로 마음이 자재한 경지에 오른 보살로 등장할 때는 관자재보살이라고 합니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은 완벽한 중생 구제보살로서의 주인공이니 관세음보살이고, <반야심경>에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라는 깨달음을 철저히 추구하는 수행보살로서의 주인공이니 관자재보살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천수경>에서는 아주 묘하게 두 가지를 다 취합니다.
<천수경>의 원래 경명이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경’인데, 이 경명에는 중생구제의 보살과, 수행을 완성해 마음이 원만 자재한 보살의 경지를 다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한 걸음 더 내치면 경명에서 용어의 복합적 사용에서 암시하듯이, 이 <천수경>은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중심으로 그 전후의 격(格)이 너무나 차이가 나서 때론 그 핵심을 잡기가 난감한 부분이 있습입니다. 해설자의 입장에서는 부분적인 모순을 감수해야 하는 난감함을 <천수경>의 본문을 들어가며 설명하겠습니다.

앞부분 ‘아약향지옥’ 등에서는 내가 죄를 지어 지옥에 가면 관세음보살님께 구제해 달라고 발원합니다. 내가 스스로 지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신감을 세우지 못하고 관세음보살님께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서는 ‘죄무자성종심기’, 즉 ‘죄는 본래 그 자성이 없어....’라며 지옥에 가고 말고도 결국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으로 설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곳곳에 신앙적 불교와 수행의 불교가 함께 있고, 또 소승 · 대승불교와 밀교가 혼재되어 있는 경이 <천수경>입니다.

이 문제는 뒤에 구체적으로 재론하고 있으니, 지금은 다시 관자재보살의 설명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관세음보살과 관자재보살은 이런 ‘주체’의 차이에 따라 구별하여 칭명(稱名)합니다. 그런데 <능엄경>이라는 경전에는 왜 관세음보살이라 불리게 됐는지, 그 인연에 대해 밝혀 놓은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서두의 관세음보살을 설명할 때 이미 밝힌 부분과 유사하긴 하지만, 경전 속에서 직접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소중한 일입니다.
<능엄경> 권6의 해당 부분을 발췌하였습니다.

 

「관자재보살이 말하였다.

세존
이시여! 저는 또다시 이 듣는 놈을 훈습하고 듣는 놈을 닦는 금강삼매의 작위(作爲)가 없이 오묘한 힘으로 시방 삼세 육도의 모든 중생으로 더불어 애절한 우러름이 같으므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저의 몸과 마음에서 열네 가지 두려움 없는 공덕을 얻게 하겠나이다.
...(중략)...
제가 처음으로 오묘하고 오묘한 듣는 마음을 얻고서 마음이 청밀해지고 들음을 버릴 수 있게 되어 보고 듣고 깨닫고 느끼는 것이 따로이 막히는 것이 없어서 하나로 원만하게 융통하고 청정한 보배의 깨달음을 이루었으므로 저는 여러 가지 오묘한 용모를 나타내며 그지없는 비밀스러운 신주를 말하노니.....
...(중략)...
세존
이시여! 저 부처님께서 제가 원만하게 통하는 법문을 훌륭하게 증득하였다고 찬탄하시고 큰 모임에서 저에게 수기하여 ‘관세음’이라 하였으니, 이는 저의 들음을 관함으로 말미암아서 시방이 원만하게 밝았으므로 관세음이란 이름이 시방세계에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정리하면 관세음보살은 세상의 소리[世音]를 관찰[觀]하는 것을 수행의 근본으로 삼아, 보살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에게 ‘관세음’이라고 수기(受記)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세음보살의 소리로 얻은 경지를 이근원통(耳根圓通) 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천둥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나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나를 칭찬하는 소리 등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기는 하되, 그 마음에 흔들림이 없으면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수행을 하여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불법을 따르며 마음을 닦는 수행을 한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관세음보살님과 같은 경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하여도, 적어도 관세음보살의 ‘소리수행’을 응용하면 언제 어느 곳이건 가릴 것 없이 수행하는 마음이 증장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