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넓고 크고 원만하여 걸림이 없는 큰 자비심의 대다라니) |
광대원만廣大圓滿
광대란 공간적으로 넓고 커서 우주에 가득 차 있다는 뜻입니다. 원만이라는 말은 낱글자로 펼쳐 보면 모가 나지 않고 둥글고[圓] 또한 비어있지 않고 속이 꽉 차있다[滿]는 뜻입니다. 흔히 '그 사람 성격이 원만하다' 라는 말도 대체적으로 이런 의미로 씁니다. 하지만 불교에서의 ‘원만’은 그리 간단치 않은 용어입니다.
가톨릭은 피임과 낙태를 절대 구원 받지 못할 죄로 규정합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낙태나 피임은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혼외정사나 결혼을 하지 않은 남녀는 섹스를 하면 지옥 갈 음행을 저지르는 행위로 단정합니다.
현실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이런 경우를 상정해 보겠습니다. 한 남자는 결혼하여 부인과 잠자리를 ‘충실히’ 하여 예닐곱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세례를 받고 성당 미사에도 빠지지 않는 신자이긴 합니다만, 무능하고 술주정뱅이라서 살림은 모두 여자가 도맡아 꾸려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병약하여 낳는 아이가 병으로 죽는 경우도 있고, 살아 있는 어린 아이들도 교육은커녕 주린 배를 채우기에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피임과 낙태는 신자로서는 지옥행이 분명하다며 피임조차 반대하는 남편 때문에 여자의 배는 정기적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한편 다른 한 남자는 종교도 없고 하나님도 모르지만 결혼도 포기한 채 자신의 인생을 오로지 봉사를 위해 살아갑니다. 세계 곳곳의 오지를 다니며 자신이 가진 온갖 기술과 능력을 오직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위해 바칩니다. 그런 그도 가끔은 현지의 여자와 사랑에 빠져 황홀한 밤을 지내기도 합니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랑은 음탕한 행위를 하는 것이고, 더욱이 하느님을 믿지 않기에 천당을 가기는커녕 지옥을 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지금의 교황청 교회법에 의하면 논쟁의 여지가 없는 너무나 당연한 결론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의 논리로는 원만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과거에 결정된 것은 그렇다 치고 현재의 가톨릭의 결정들은 원만한가를 2008년 1월 2일 보도된 교황의 결정을 보며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교황청이 악마와의 정면 승부를 벌이기 위해 사제 수백명을 퇴마사(엑소시스트)로 양성하는 계획을 마련했다고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 인터넷 판이 31일 보도했다.
바티칸의 최고위 퇴마사인 가브리엘레 아모르트 신부는 전 세계적으로 악마주의와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는 현상을 경계하면서 이 같은 계획을 발표했다.
논의 중인 계획에 따르면 모든 주교는 ‘극단적인 신(神)의 부재상태’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도록 각자의 교구 내에 특별한 퇴마 훈련을 받은 일군의 사제들을 두게 된다.
아모르트 신부는 너무 많은 주교들이 퇴마 훈련을 받을 사제들을 두지 않는 등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나 “다행히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악의 존재와 위험성을 믿는다”고 말했다. 퇴마전문가인 파올로 스카라포니 신부는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잃을수록 악마주의와 초자연적 현상이 기승을 부린다”며 사람들은 악마가 고통을 덜어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교회법 1172조에 따르면 모든 사제는 퇴마의식을 거행할 수 있지만 실제 악령을 추방할 수 있는 사제는 소수에 불과하다. 바티칸은 그간 젊은 세대가 미디어와 록 음악, 인터넷 등을 통해 번지는 악마주의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며 염려를 표시해 왔다.」
이것이 종교의 보편성 중 하나인 ‘원만’한 일인지, 아니면 엑소시스트란 영화에 대한 언급인지 헷갈립니다. 더군다나 록 음악과 인터넷도 악마와 연관 짓는 일을 교황이 언급하다니 저로서는 좀 황당합니다.
주제넘게 다른 종교를 참견했으니 당연히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불교는 좀 더 강렬한 예를 드는 것이 도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의 불교는 스스로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최고의 종교이니 타종교와는 그 깊이를 비교하지 말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았다는 말이지, 현재의 한국불교가 깨달음을 간판으로 내세울 정도로 당당하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것과는 엄연히 구별되어야 합니다. 마치 훌륭한 스승 밑의 제자도 그 스승과 똑같은 존경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난센스라는 말입니다.
승단의 일원으로 이런 한국불교의 답답함에, ‘원만’의 예를 핑계 삼아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정스님은 70년대의 암울하며 희망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에 한국불교의 최고의 지성으로 불자들은 물론 일반 국민에게도 감로수와 같은 역할을 하신 스님입니다.
중생을 위한 현실적 참여와 무소유의 정신에 감명받은 김영한(길상화) 보살이 자신 소유의 최고급 요정이었던 7천여 평, 1987년 당시 시가로 천억 원 이상의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보시한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10년 동안 보시 받기를 사양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길상화 보살이나 법정스님 모두가 종교적 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을 ‘원만’하게 해낸 것입니다. 그 후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절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좀 외람된 말씀을 드리면, 이제는 길상사를 매각하여 수천 억의 종자돈으로 불교사상 최고의 불사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우선 불사의 명분을 말씀드리자면 법정스님이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이런 불사를 할 수 있는 스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법정스님은 70년대 민주화운동 때 불교계 인사로는 드물게 많은 고초를 겪으셨고 한편으로는 시대를 대표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를 앞서가시며 중생의 아픔을 같이 한 스님이십니다.
그러나 어느새 30여 년이 흘렀습니다. 그 당시 자유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온 국민의 화두였다면, 지금은 빈부의 격차로 인한 심각한 사회적 갈등해소가 국민적 화두가 되었습니다. 가속화되는 빈부의 격차는 인간의 마음까지 왜곡되게 만들고, 개인의 삶의 질을 결정짓는 잣대 중 하나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어린 학생들이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가슴에 큰 상처를 입고, 병든 노인들은 단 몇 만원이 없어 제대로 치료도 받을 수 없습니다. 전기세 아끼느라 촛불로 방을 밝히다가 불이 나서 참변을 당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단순한 물질의 대상인 돈이, 지금의 중생들에게는 ‘생명’이 되어 버린 야속한 세상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길상사가 얼마나 의미 있는 절인지는 누구나가 공감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길상사가 없다고 한국불교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님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몇 백, 몇 천 명의 신도를 위한 길상사가 아닌, 세계적인 수행도량으로서의 길상사를 훨씬 좋은 장소에 건립할 수도 있는 충분한 여건도 마련될 것입니다.
이렇듯 제 소견은 성북동의 길상사를 매각하여 현 시가로 수천억 원의 종자돈을 마련하여, 본격적인 중생 구제에 나서자는 말씀입니다. 이 중생 구제의 불사야말로 한국불교의 역사상 중생과 같이 하는, 아니 불교가 고단한 중생들을 위해 처음으로 실천하는 최고이자 최대의 진정한 불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중생구제의 불사는 시대의 사표(師表)이신 법정스님 만이 하실 수 있는, <천수경>에서 말하는 ‘원만’회향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