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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

(법의 곳간을 여는 신비한 말)

 옴 아라남 아라다

(번뇌가 사라진 안락한 마음으로 평안합니다.)


개경게가 대문을 여는 격이라면, 개법장진언은 바로 진리 그 자체인 법의 곳간을 여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千手千眼 觀自在菩薩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갖추신 관자재보살님이시여)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반야심경>처럼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로 시작되는 경전까지 있을 정도로 불교의 가장 친숙한 보살이십니다.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합니다. 이 보살님은 세상()의 중생들의 소리()를 관찰()하시고, 모든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의미에서관세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보살(菩薩)은 부처님의 입멸(入滅) 후 거의 500년 이후에 발생한 대승불교의 특별한 존재입니다. 다시 말해 불교발생 초기에는 어리석은 중생 아니면 깨달음을 이룬 성인, 둘 중 하나였습니다. 부처님도 아라한(阿羅漢) 중 가장 수승한 정도로 인식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의 아라한 개념과는 다른 아라한이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자신의 깨달음보다는 남을 위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우선시 하거나, 적어도 이타행 자체가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라는 사상이 생겨난 것입니다.


수행자가 남을 위해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무슨 얘깃거리가 되는가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2,500여년 전 당시는 산 속에서 혼자 목숨을 걸고 수행을 하는 것을 수행자의 기본 조건이라고 확신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평범한 세상살이를 하며 남을 위해 사는 것도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이라고 선언하며, 또한 그것이 사상적으로 완성된 일은 당시에 수행의 개념을 넘어서는 대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기존의 바라문과 다른 이런 수행을 보살도(菩薩道) 혹은 보살행(菩薩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보살은 이처럼 큰 자기희생을 아무런 대가 없이 이뤄나가고, 그 바람이 있다면 오직 중생을 위한 것뿐인 위대한 삶을 실천하는 분입니다.

2006 12월에 저는 심장수술을 받았습니다. 3개의 심장관상동맥과 1개의 심장동맥을 제 몸 안의 다른 동맥을 체취하여 우회연결(By pass)시키는 큰 수술이었습니다. 8시간 동안을 심장과 폐의 기능을 외부장치에 의존시켰으니, 현대 의학기술의 덕 아니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서울 아산병원 집중치료실에서 겨우 의식을 되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이곳 집중치료실(ICU:intensive care unit)은 일반 중환자실과 달리 저와 같은 심장수술을 한 환자만 전문으로 회복시키는 곳입니다. 담당 간호사는 한시도 환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순간순간 환자의 상태를 모니터링하며 예상치를 벗어나면 즉각 조처를 취하게 됩니다.


그런데 저보다 하루 먼저 수술을 한 환자를 맡고 있던 간호사가 애원하듯, 그러나 숨을 죽여 속삭이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오, 안 돼 안 돼. 지금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어! 도대체 왜 이 방법도 저 방법도 효과가 없지? 이 상태라면 환자는 지금 의학적으로는 죽었다 살았다를 되풀이 하는 것인데, 안 돼, 내가 지금 그 짓을 하고 있단 말이야!”


저는 제가 받은 수술로 목 아래서 배 까지 몸 앞쪽의 갈비뼈를 모조리 갈라 놓았고, 손은 묶여있는 상태라는 것조차 겨우 인식할 정도였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이 바짝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외침은 바로 옆 침대의 같은 수술을 한 환자의 일이니 남의 일이 아니고, 더욱이 고귀한 사람의 생사가 촌각에 달려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간호사의 절규 속의 온갖 노력도 불과 몇 분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감동받은 것은 이때부터였습니다. 최선을 다한 간호사는 그 환자 옆을 떠나지 못하고 흐느꼈습니다.


‘아, 이건 아니야. 내게도 최선을 다할 시간을 달란 말이야! 단 몇 분이라도 더! 아니야, 이건 내 실력이 부족해서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맡았으면 살릴 수도 있었을 거야!‘


이런 흐느낌이 계속되자 팀장 격인 선배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넌 최선을 다했다. 울지 마라, 빨리 냉정해져야 다음 환자를 돌볼 것이 아닌가? 설령 내가 맡았어도 그 환자는 힘들었다. , 네가 최선을 다한 환자를 위해 마지막 마무리를 해야지.’


저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어느 성직자가 이런 모습을 연출해 낼 수 있겠습니까. 입 만 때면 자비와 사랑을 부르짖는 그들이지만 과연 어린 이 간호사에게 어떤 법문과 설교를 줄 수 있겠습니까.


보살의 자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의 몸 가지고는 부족한 것이기에, 중생을 돌보기 위해 상징적으로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인천수천안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