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넓고 크고 원만하여 걸림이 없는 큰 자비심의 대다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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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無碍
무애라는 말은 여러분들에게 전혀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애 ’하면 원효스님과 요석공주가 먼저 떠오르신다면 제 생각과 같습니다.
사회적 규범과 종교적 계율의 잣대로는 잴 수 없는 걸림 없는 경지의 마음을 무애라 하고,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을 무애행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의 ‘원효불기(元曉不羈)’편에 수록된 관련 내용을 소개해드리는 것으로 설명을 대신해도 충분할 듯 싶습니다.
「스님은 어느 날 풍전(風顚:상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여 거리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
사람들은 누구도 그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다. 이 때 태종이 이 노래를 듣고,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 때 요석궁에 남편을 여윈 공주가 지내고 있었으므로 궁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명령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니, 이미 그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오고 있어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이 때 일부러 물에 빠져서 옷을 적셨다. 궁리가 스님을 궁으로 데리고 그 곳에서 묵게 했다. 공주는 과연 태기가 있더니 설총을 낳았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여 총을 낳은 후에는 속인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를 소성(小姓)거사라고 하였다. 우연히 그는 광대들이 가지고 노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이상하게 생겼다.
스님은 그 모양에 따른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 한 구절인, ‘일체의 무애인(無碍人)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 했다.
이 도구를 가지고 일찍이 수많은 마을을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가난한 사람 몽매한 사람의 무리들도 다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마을 이름을 불지촌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라 하였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원효라 한 것은 모두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고, 원효란 이름도 역시 방언이며, 당시 사람들은 모두 향언으로 원효를 일러 새벽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