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廣大圓滿 無碍大悲心 大陀羅尼 (넓고 크고 원만하여 걸림이 없는 큰 자비심의 대다라니) |
비심悲心
비심은 다른 사람의 슬픔이나 고통을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진심으로 여기며 자비를 베푸는 마음을 말합니다.
아프간에 한국인들이 인질로 잡히고 탈레반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 국민들은 모두 내게 벌어진 일처럼 큼 슬픔을 느꼈습니다. 바로 이런 심정이 비심(悲心)입니다. 태안 앞바다 유조선 사고 때 서해안에 30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인 것도 비심의 발로입니다.
성선설(性善說)의 바탕이 되는 것도 비심입니다. 인간도 그러하니 부처님과 다를 바 없는 보살이 대비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역시 보살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아프간에 선교사를 파견했던 샘물교회의 선교방식을 당사자인 개신교조차 문제 삼았지만, 결국 일을 저지른 샘물교회는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서해안의 기름은 어느 정도 제거했지만, 속절없는 피해로 살길이 막막해진 수많은 주민들에 대한 대책은 강구되지 않고 있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흔히 출가자가 부모님 상을 당해도 속가에 가지 못하게 합니다. 직접 가서 돌아가신 부모를 극락으로 인도하지 못할 바에는 절에서 수행에 정진하는 것이 차라리 효도라 합니다. 참으로 냉정하고 엄하게 수행의 정신을 강조하는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도가 죽으면 며칠 밤을 세워가며 염불을 해주면서, 정작 부모님의 경우에는 그런 매정한 법도를 미덕으로 삼는 것인지 저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일체 중생에게 비심을 베푸는 것이 불교의 근본인데, 부모는 제외시키다니 출가자의 부모는 중생이 아니란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스님의 가풍(家風)에서 시작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라는 중생이야 말로 내가 수행자가 되게끔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보살’인데, 출가자의 부모는 공덕은 커녕 중생보다 못한 대접을 하는 불가의 불문율은 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천수천안 관자재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대다라니 계청’을 해설하면, ‘관자재보살이 천수천안으로 중생을 구제하시며 광대하고 원만한 대다라니를 큰 비심(悲心)으로 설하시길 청하옵니다’가 됩니다. 그러면서 청하는 마음을 밝히는 것이 다음으로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게송 앞에 계청(啓請)을 제목처럼 표기하기도 합니다만, <천수경>의 문맥상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