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척진로원제해洗滌塵勞願濟海 온갖 번뇌 씻어내어 고해의 바다 건너 초증보리방편문超證菩提方便門 속히 깨달음의 방편문을 증득하게 하여지이다 |
내게 있는 아주 작은 티끌 같이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번뇌와 고통이 물로 씻겨 없어지듯 단번에 사라지면 그것이 곧 중생들의 세계인 고해의 바다에서 벗어나는 길이고, 더 나아가 깨달음까지도 성취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
보리菩提
보리는 <천수경>에 나오는 말 중에서도 비교적 어려운 말입니다. 앞의 ‘세척진로원제해’는 윗줄에 풀어 놓은대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보리’와 ‘방편’은 세심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보리(菩提)의 ‘提’는 본래 음이 ‘제’인데 유독 불교에서만 ‘리’로 읽습니다. <천수경> 설명 중 시방(十方)의 ‘十’도 십이 아니라 ‘시’라 읽고, 뒤에 나올 도량(道場)의 ‘場’도 장이 아니라 ‘량’이라 읽습니다. 불교 경전에는 이런 한자가 꽤 있는데 읽으시는 분들이야 익숙해지면 불편이 없을지 몰라도, 이렇게 컴퓨터로 원고를 쓰다 보면 한자를 입력할 때 불편하긴 합니다.
보리는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은 보살의 지위 정도의 깨달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보살이란 단어는 싼스끄리뜨어 보디사뜨바(Bodhisa깨달은+sattva사람)를 원어 발음에 가장 가깝게 한자로 표시하다 보니 보리살타(菩提薩타)가 되고, 이 말이 줄어 다시 보살(菩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천수경>의 보리를 이해하려면 깨달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깨달음을 완성하지 못한 제 능력으로는 당연히 설명이 불가합니다.
다만 통상적으로 빠지기 쉬운 깨달음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깨달음을 평상심과는 대단히 심각하게 다른 세계의 정신적인 ‘무엇’이라는 상정을 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어리석음의 극치인 무명(無明)의 정반대에 깨달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명과 깨달음이 양 극단에 있다는 생각은 불교를 이해하는데 큰 장애입니다.
무명과 깨달음 두 가지 영역 모두 자신이 생각하는 크기 만큼 생기고 존재합니다. 더욱이 떨어진다, 빠진다는 말도 무명과 깨달음 두 경우에 다 해당되는 말입니다. 즉 무명에만 ‘빠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도 ‘빠진다’는 말이 성립됩니다. 어리석으면 당연히 어리석은 만큼 무명에 빠진 것이고, 깨달음도 자신이 깨달았다고 감지하는 순간, 그 크기에 해당하는 만큼의 깨달음에 빠져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빠진다’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니, 안팎의 구별을 전제로 하는 그 ‘무엇이든’ 그것은 법계와 진리의 이치에서 어긋나게 됩니다. 더군다나 빠진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에 크게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달음에 빠지나 무명에 빠지나 실은 똑같은 것입니다. 깨달음에 빠지는 것[法執]이 격이 높은 건 절대 아닙니다. <천수경>에서 말하는 보리 정도의 깨달음이라면 모를까, 아닌 말로 시중에 유통되는 깨달음의 수준은 이 범주를 결코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수경>에서는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방편문’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