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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사방찬四方讚

사방찬四方讚

신묘장구 대다라니 후에 바로 사방을 정화하고 찬탄하는 의식(儀式)인 사방찬이 등장합니다.

<천수경> 시작부에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 즉 동서남북·중앙· 위아래 등 모든 곳에 계신 신들을 안위하는 진언이 있었습니다. 사방찬도 그 의미에서 유사한 면이 있으니, 그 위치가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 전이나 후에 있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사방을 찬탄하는 방법이 물을 뿌리는 정화의식인 세례(洗禮)입니다.

‘세례’ 하면 우선 기독교를 연상하실 텐데, 물에 의한 속죄나 축복의 의식(儀式)은 불에 의한 의식(儀式)과 더불어 그 역사가 상당히 깊습니다.

기원전 6세기경 자라투스트라(Zarathushtra)라는 인물에 의해 페르시아와 이란을 중심으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를 신봉하기에 마즈다예배교(Mazdayasna)라 하는데, 불을 숭배한다고 하여 배화교(拜火敎)라고 불리기도 합니다.(이미 기원전 1200년 무렵부터 동북 이란에 정착하게 된 인도이란어족 사이에서 퍼졌다는 설도 있음)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라는 단행본은 니체의 철학과 사상의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꼽히고, 리하르트 시트라우스의 ‘자라트수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제목의 교향곡도 있을 정도로, 유럽과 중동부 지역에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그런데 예수의 인도에서의 수행의 논란과는 다르게, 기독교의 발생과 그 교리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준 종교가 바로 불을 섬기는 이 조로아스터교라는 데에는 종교학자들의 견해가 일치 합니다.

밀교(密敎) 또한 불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불로써 수행의 장애인 마(魔)를 소멸시키는 호마법(護摩法)은 밀교의 전매특허입니다. 불을 통한 정화와 축복과 함께 물에 의한 의식인 세례가, 불교에서는 관정(灌頂)이라는 의식으로 경전에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이 ‘너는 장차 이런 이름의 부처를 이룰 것이다’라는 수기(受記)를 하시며 머리의 앞부분에 물을 붓는 의식을 관정(灌頂) 이라고 합니다.

한국 불교에서는 일상적인 의례로의 관정의식은 행하지를 않고, 다만 초파일 행사의 하나로 아기부처님 상의 머리 위에 향을 섞은 청정한 물을 붓는 의식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를 관불식(灌佛式) 혹은 욕불식(浴佛式) 이라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지금도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는 행위를 세례 의식으로 중하게 여깁니다. 한국의 절에서도 남방 불교의 스님이나, 티베트의 스님을 초빙하여 법회 때 신도의 이마에 물을 뿌리는 축복의식을 관정식이라 하여 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의식이 우리나라 신도들에게 특별히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일쇄동방결도량一灑東方潔道場
첫 번째 물을 뿌려 동방세계의 도량이 맑아지며

결도량潔道場
첫 번째 동쪽에 청정수를 뿌려 수행처를 청정케 한다는 뜻입니다. 동방세계는 아촉여래가 묘희정토를 이루고 있다 합니다.

이쇄남방득청량二灑南方得淸凉
두 번째 물을 뿌려 남방세계 청량을 얻고

득청량得淸凉
두 번째 남쪽에 청정수를 뿌려 그 세계를 청량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남방세계는 보생여래가 환희정토를 이루고 있다 합니다.

삼쇄서방구정토三灑西方俱淨土
세 번째 물을 뿌려 서방세계가 정토 이루고

구정토俱淨土
세 번째 서쪽에 청정수를 뿌려 그 세계를 청정케 한다는 뜻입니다. 서방세계에는 아미타여래가 극락정토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사쇄북방영안강四灑北方永安康
네 번째 물을 뿌려 영원히 편안해지이다

영안강永安康

네 번째 북쪽에 청정수를 뿌려 그 세계가 평안해지라는 뜻입니다. 북방세계는 미묘생여래가 연화장엄정토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듯 사방을 모두 찬탄했는데 그 순서가 우리의 입에 붙은 동·서·남·북 이 아니라 동·남·서·북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행(五行) 사상의 영향인 듯합니다. 오행의 상생 순서가, 木(동방)-火(남방)-土(중방)-金(서방)-水(북방) 인데, 여기서 가운데인 중방을 뺀 순서와 같습니다.

도량찬道場讚
도량을 찬탄합니다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도량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하나도 없고

도량청정道場淸淨

도량은 수행을 하는 성스러운 장소를 말하는데, 이런 의미로 쓰일 때는 ‘도장’이 아니라 ‘도량’으로 발음합니다. 절이라는 공간이 대표적인 도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도량은 통상적으로 ‘공간’을 뜻하는 단어인데, <천수경>의 앞뒤 맥락을 보면 ‘도량찬’의 도량은 내 자신의(<천수경>을 독송하는 모든 사람의) 불법을 찬탄하고 발원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마음의 밭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어디 법당만이 수행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있는 곳이 어디건, 주변 환경이 어떻건, 내 마음의 본래 성품인 불성(佛性)을 회복하는 것이 불법의 근본입니다. 그러니 절에 가면 조금 정신이 나고, 집에 오면 바로 망상과 집착에 사로잡혀 부처님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이거야말로 불교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기도는 반드시 법당에서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스님이 계신다면, ‘어디까지가 법당입니까?’하고 물어 보십시오.

‘도량청정무하예’ 라는 구절은 ‘도량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하나도 없고’라는 뜻입니다.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삼보와 천룡이 강림하시고

삼보천룡三寶天龍

불·법·승 삼보는 다음에 또 나오니 그때 설명 드리겠습니다.

천룡(天龍)은 하늘에 있는 불법을 옹호하는 신으로서의 용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설의 고향이나 영화의 주제가 연상되는 용이 불법을 옹호하는 신의 역할을 인정받은 것이 흥미롭습니다. 동양에서 용의 이미지와 달리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서양의 용의 개념은 천사 미카엘이 퇴치해야 할 대상이며 악의 상징으로, 사탄과 거의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동양의 용은 본래 바다에 사는 것이 원칙이고, 용이 하늘로 승천(昇天)하면, 그 용은 이미 동물로서의 용이 아니라 악에 맞서 인간을 지키는 선신(善神)으로 승격이 됩니다.

바다의 용이 하늘로 오를 때 모습을 ‘용오름’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바다에서 일어나는 ‘토네이도’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요. 때를 놓치거나 능력 부족으로 용오름에 실패한 용이 이무기라고 불리는 것은 다 아실 겁니다.

어쨌건 <천수경>의 용은 승천에 성공한 능력 있는 천룡이, 내가 불법을 받드는 도량을 옹호하기 위해 땅으로 내려 왔다는 말씀입니다.

또 한 가지, 용은 거의 모든 경전의 말미에 불법을 옹호하고, 불법에 귀의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용이 등장하는 <법화경>의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이 경을 설하실 때, 보현 등 여러 보살과, 사리불 등 여러 성문과, 하늘과 용과 사람과 사람 아닌 이 등 모든 대중이 모두 크게 환희하여 부처님 말씀을 받아 지니고 예배하고 물러갔다.

 '삼보천룡강차지' 라는 말은 삼보와 천룡이 강림하시어, 이 자리를 보호해 달라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