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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ddhism

묘진언妙眞言, 가호加護

아금지송묘진언我今持誦妙眞言
내 이제 미묘한 진언을 읽으니

 

묘진언妙眞言

진언을 밀교의 수행법이라고 서두에 말씀드렸습니다.

고려대장경에 수록된 경들을 보면 진언이 생각보다 상당히 많습니다. 더욱이 ‘이런 진언이 과연 미묘하고 신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해줄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밀교 수행을 하는 분들은 의심 자체를 반박하시겠지만 한편으론 독충(毒蟲)에 물렸을 때 이런 진언을 외우면 된다는 경전의 말을 그대로 믿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진언 수행법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진언이 수행의 만사를 해결해 준다는 생각이야 말로, 큰일 날 ‘불법’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석문예범(예불과 불공, 시식 등 불교의 의식을 정리한 교범)’에 보면, 불공이나 제사 등 모든 의식에 빠지지 않는 진언이 있는데 바로 보궐(補闕)진언입니다.

행여 독경과 염불 등 예식에서 본인도 모르게 빠뜨린 부분을 이 진언이 다 보충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 그대로 ‘보궐진언’입니다. 진언 만능주의로 극단적인 예를 들면 <천수경>을 독송하면서 ‘정구업진언’ 다음에 바로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하고 이어서 보궐진언 ‘옴 호로호로 사야모께 사바하’를 세 번 하면 되다는 것입니다.

진언에 대해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철스님은 삼천배를 해야 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법문을 듣기 위해 속된 마음을 미리 ‘청소하라’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삼천배를 하고 나면 어떤 스님이 어떤 가르침을 내려도 마음에 팍팍 꽂힐 겁니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들은 말씀인데’라는 생각으로 잊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 중생들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성철스님은 선(禪) 수행에 앞서 반드시 <능엄경>에 있는 ‘능엄신주’ 주력을 수행 과정의 필수라고 하셨습니다.

화두로써 번뇌를 다스림은 물론 화두의 타파가 곧 깨달음이라는 간화선만, 더욱이 돈오돈수만을 바른 법이라고 단언한 성철스님의 수행관과, 진언 수행인 능엄신주를 필수 과정이라고 하신 수행관을 동시에 받아들이기에는 참으로 난감한 점이 있습니다.

근래에는 성철스님의 후학들이 ‘아비라기도’라는 이름으로 삼천배와 법신진언, 능엄신주 주력(呪力)을 한데 묶어 성철스님이 정립하신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철스님의 가르침을 오버 해석하여, 오히려 성철스님께 큰 누를 끼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궁금하여 살펴보니 ‘아비라기도’의 아비라라는 말은 법신진언인 ‘나무 사만다 붓다남 아 비 라 훔 캄 스바하(모든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 아 비 라 훔 캄 성취케 하소서)’에서 따와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개념과는 달리 <천수경>의 ‘아금지송묘진언’은 신묘장구 대다라니라는 ‘묘진언’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원사자비밀가호願賜慈悲密加護
원컨대 은밀한 가호와 자비를 베푸시고

 

가호加護

가호라는 말이야말로 전형적인 종교언어입니다.
기독교인들의 연설말미에 등장하는 ‘God bless you'도,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불교에서는 실은 ‘가호’라는 말보다 ‘가피’라는 말이 더 일상적으로 쓰여집니다. 불공 축원을 할때도 ‘불·보살의 가피가 있길...’이라고 합니다.

한국의 종교적 용어는 거의 불교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배’ ‘장로’ ‘가호’등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렇다고 불교가 우쭐해 한다면 그건 유치한 생각입니다. 무려 1,6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불교에서, 다른 종교들이 몇 가지 용어를 차용하거나 응용하여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컨대 은밀한 가호와 자비를 베푸시고’라는 이 대목을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이미 독송했으니, 이제 내게 가피를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