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자비하신 관음보살님께 귀의하옵니다. 원아속득계정도願我速得戒定道 바라오니 계를 지키고 선정이 속히 얻어지게 해주소서 |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바라는 일곱 번째 원은, 내가 계를 어기지 않고 잘 지키고, 마음이 산란함에서 벗어나 세상의 인연에 얽힌 온갖 험한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게 되길 바라는 원입니다. 혹 이 부분에서 계정도(戒定道)를 계족도(戒足道)로 표기한 경우가 있는데 ‘계정도’가 맞습니다. |
계戒
계(戒)는 수행을 위해 개인이 지켜야 할 덕목을 말합니다. 계는 출가자와 재가신도가 지켜야 할 계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계의 구별도 출가자의 경우 사미계 · 비구계 · 보살계 등이 있고, 재가신도에게 해당되는 삼귀의 계 · 10계 · 보살계 등이 있습니다.
이 중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는 그 가짓수만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나 됩니다. 그런데 출가 스님들이 지켜야 할 비구 · 비구니계라는 것이 거의 2,5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라 지금에 와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명확히 표현하자면 제정되어 있는 계를 모두 지키려면 현실적으는 살아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스님은 지금 파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 신도와 단 둘이 마주 앉아 있어도 계를 어기는 것이고, 스님의 거처가 2~3평 이상이 되어도 계를 어기는 것입니다. 절에 소금을 보관해도 계를 어기는 것이고, 보시 받은 것은 물건이건 돈이던 혼자 독차지해서 써도 계를 어기는 것입니다. 승복도 철 따라 여러 벌 갖고 있는 것도 계를 어기는 것이고, 공양도 태국이나 미얀마 스님들 같이 탁발하여 먹어야 합니다.
비구니 스님들에게는 더욱 불합리한 계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비구니계를 받지 아니한 여인과 경법을 같이 읽지 말라’는 신도와 경을 읽으면 계를 어긴 것이 됩니다. 더욱이 ‘환자와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 15일이 안 되어서는 목욕하지 말라’는 계나 ‘아무리 출가한 지 오래된 비구니라도 갓 출가한 비구를 보면 절을 해야 한다’라는 등의 계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로 시행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맞지 않아 도저히 스님들이 지킬 수 없는 계는 현실화 시키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아직 진지한 논의는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도들이 지켜야 할 계도 정도는 다르지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 고기먹지 말라는 계의 유무에 대해서는, 앞서 삼정육 (三淨肉)은 먹어도 된다고 부처님이 허용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게다가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받으신 공양인 춘다가 올린 음식이 마른 돼지고기 요리 (혹은 버섯의 일종이라는 설도 있음)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불멸(佛滅 )후 약 천 백여 년이나 지난, 기원후 500년대 중국의 <범망경(梵網經)>에서는 스님과 신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보살48경계’에 육식을 금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다만, 몸이 허약해 약으로 취해야 할 경우는 제외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방불교권인 태국, 미얀마 등의 스님들은 육식을 금하지 않고, 더욱이 불교를 소승과 대승으로 구별하는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또 일반인들도 아주 궁금해 하는 문제가 있는데, 절에서 왜 개고기를 그토록 금기시 하여 먹지 말라고 강조하는가입니다. 개고기가 한민족의 풍속에 속하는 먹거리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가지로 해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다음에 소개해 드리는 이유가 가장 타탕성 있어 보입니다.
과거 절들은 대부분 깊은 산속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빌딩 숲 한 복판에 있는 강남의 봉은사도 실은 깊은 골짝에 해당되던 곳입니다. 그러니 다른 절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호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고기가 바로 개고기라는 것입니다. 그런 개고기를 먹은 후 깊은 산속에 있는 절을 오르다 보면, 숲속의 호랑이들이 개고기 냄새를 맡고 결국 사람을 해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치거나 잡아먹히게 되니, 절에 올 때는 절대 개고기를 먹지 말라는 강력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불교의 개고기 절대 불가론의 시작 이라는 셈입니다.
계에 대한 저의 마무리 말씀은 경에 정한 계율을 모두 지키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마음에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일은 계에 어긋난다고 스스로 원칙을 세워 행하지 말자’입니다.
정定
정(定)은 설명과 이해 모두 어려운 말입니다.
계(戒)·정(定)·혜(慧)를 불교공부와 수행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의미에서 삼학(三學)이라고 합니다.
아마 <천수경>의 ‘계정도’ 도 이면에는 필시 계 ·정· 혜를 지칭하는 삼학을 염두에 둔 것인데, 음율을 맞추느라 ‘혜’를 생략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앞서 삼매를 설명하며 정(定)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 바와 같이, 정(定)은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에 드는 것을 말합니다. 선(禪)은 정(定)에 이르는 가장 수승한 방법으로 부처님 당시에도 행해졌던 수행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후에 중국에서 묵조선, 간화선 등으로 정(定)에 드는 방법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선’ 혹은 ‘선정’ 하면 무조건 화두를 타파하여 정(定)에 드는 간화선(看話禪)만을 염두에 둔다면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간화선은 10세기 초(불교 발생 후 약 1.500년 후) 중국의 대혜 종고스님 때 시작 된 수행법으로 거의 500년의 역사가 있지만, 이 수행법 역시 미래에도 계속 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모든 정(定)에 드는 수행이 그렇긴 하지만 화두를 타파하는 간화선은 어찌 보면 마음의 흐름에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출중한 경험을 쌓은 선지식(善知識: 뛰어난 스승) 의 점검과 지도가 필수적입니다. 간화선이 현재로서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이라 하더라도, 큰 스승들이 없으면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방법인 것입니다.
정(定)에 도달한 상태가 되면 일체의 번뇌가 다스려져서 마음에 흔들림이 없고, 그윽하고 넉넉한 마음의 경지를 얻어 무한한 평온과 자비심에 이르게 됩니다. 흔히 대자유인이란 말은 이런 경지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정(定)에 이르렀다 해도 수행의 완성은 결코 아닙니다. 정(定)에서 한 걸음 성큼 나아가 혜(慧)를 증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 하면, 혜(慧)를 증득해야 그 경계에서 진정한 자비와 방편이 나오기 때문에, 정(定) 자체로는 증득한 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혜(慧)의 경지에 도달해야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정신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수행자가 정(定)에 도달했고 홀로 수행을 하다 열반에 들었는데 주변의 누구도 그 사실을 모른다고 가정해 보면, 이것은 대승불교에서 소승이라고 폄하하는 독각(獨覺)에 불과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독각의 수행과 정(定)에 이르는 수행은 그 경지가 다르다고 반대의견을 내는 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행으로 회향되지 않는 한, 결코 두 경우의 깨달음의 가치가 다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에서 한국불교가 앞으로는 <천수경>에 숨겨진 ‘계정도’ 속의 혜(慧)에도 주목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