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대비관세음南無大悲觀世音 자비하신 관음보살님께 귀의하옵니다. 원아속회무위사願我速會無爲舍 바라오니 속히 무위의 집을 얻게 해 주소서 |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바라는 아홉 번째 원은, 내 마음이 가식없고 작위적이지 않은 경지에 도달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
무위無爲
‘원아속회무위사’는 속히 무위의 집[無爲舍]을 얻기를, 만나기길[會]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며 세운 원(願) 중 하나로 <천수경>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무위사’는 무위법(無爲法)과 같은 개념으로, 무위법을 깨닫는 것을 무위의 집[舍]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불교가 어렵다는 데는 저도 동의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오히려 스님들이 어렵게 느끼는 체감의 정도가 더 심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교를 조금 안다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불교가 종교보다 철학에 가깝다는 주장은, 귀가 먹은 베토벤이 교향곡 중 최고인 대합창이 들어간 9번을 작곡한 사실을 불가능한 거짓이라고 우기는 것보다 더 억지스런 주장입니다. 그런 분들은 베토벤을 주제로 한 영화 ‘불멸의 여인’ 이나, ‘카핑 베토벤’을 보시면 당장이라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사상은 한 번 잘못 각인되면, 정작 정답은 눈에 들어오질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 점을 여러분도 유의하시며 제 설명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구별은 논리적으로 참으로 어렵습니다. <구사론(俱舍論)>과 같은 부파불교적 논서에서부터 <금강경>등 대승경전의 논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나오는 말이 유위, 무위입니다. 흔히 생·주·이·멸(生主異滅:생겨서 변하고 소멸 됨)에 해당되면 유위법이고, 해당되지 않으면 무위법이라고 사전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게 되는 내용이면 그것은 유위(有爲)의 진리, 시대와 상황에 상관없이 말 그대로 만고불변의 진리라면 무위(無爲)의 진리라 한다는 것입니다.
‘무애’를 설명할 때 잠깐 언급했듯이, 불교의 무위는 도가(道家)의 무위하고는 그 속뜻이 전혀 다름을 상기하셔야 합니다.
잘 아시는 예를 들어 설명 드리겠습니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연구서를 통해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고,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주장했고, 우리는 이 사실을 과학적 진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중심으로한 천동설 추종자들은 이런 반론을 폈는데, 만일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면 지상에 떠 있는 공기는 멈추어 있기 때문에 지상에는 언제나 강한 바람이 불 것입니다. 따라서 공을 위로 던지면 공이 공중에 있는 동안에도 지구는 움직이기 때문에, 공은 결코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라며 ‘천동설’이 진리라고 목청을 높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이 창조한 유일한 지성적 생명체인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되어야만 했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교회를 모독하는 ‘도전’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00년이나 지난 후에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1564~1642)가 주장한 지동설 역시 세상에는 받아 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톨릭의 종교적 편견이 과학적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종교적 편견이란 성서의 기록이 모든 과학적 진실에 우선한다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 경위야 어찌되었건 인류가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는 진리를 알게 된 것은 불과 500년 전입니다. 그나마 바로 전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가 공식적으로 그때의 교회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만, 지금의 교황인 베네딕토 16세는 갈릴레오에 대한 그 당시의 교회의 재판은 ‘아주 이성적’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무위, 유위를 설명하며 난데없이 왜 종교적 진리를 과학적 잣대로 재려 하느냐고, 심기가 불편한 분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미래의 종교는 과학과 동행하지 않으면 점점 그 설자리가 좁아질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이해가 종교의 이해에 필수적인 시대가 도래 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과학은 일체 존재의 실상을 객관화 하고, 물질세계의 질서와 그 법칙을 탐구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적어도 불교의 견지에서는 실상(實相)의 묘(妙)를 그대로[如如] 관찰[照見]하여, 반야(般若)의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곧 무위법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교는 과학과 궁합이 아주 잘 맞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위법은 언제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적용이 되는 진리인데, 이것은 과학의 지향점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무위법에 속하지 않고 유위법에 속하는가?’ 라고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창조론의 문제 말고 결정적으로 기독교가 무위법에 속하려면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한 유일한 생명체’라는 진리의 말씀이 영원히 도전 받지 말아야 합니다.(창조론이 진화론에 밀리니 ‘지적 설계론’으로 말만 바꾸는 궁색함까지 보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주 과학의 발전 속도라면 늦어도 100년 안에는 이미 물의 흔적이 발견된 화성이나 토성의 위성에서 과거의 생명체의 흔적을 발견할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생명체로서는 아주 조잡한 류인 박테리아의 흔적만 발견해도 기독교는 중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쯤해서 제가 기독교에 대한 오만한 선입관이 있다는 오해를 풀기 위해 정리를 하겠습니다.
저는 불교가 무위법을 추구하는 데 비해 기독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식으로 불교 우위론적 결론을 유도하였지만 내면적으로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불교의 역사상 실제로 무위법의 경지에 이른 수행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 불교가 입으로는 무위법을 말하지만, 종교성의 실천에 있어서는 기독교에 훨씬 못 미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기독교인의 사회봉사 등에 대한 자기희생의 이타행(利他行)의 신행은 불자들이 본받아야 합니다. 일요일이면 성경을 옆에 끼고 교회로 향하는 교인들을 불자들은 본받아야 합니다. 불교의 출판물은 기독교의 1/10 정도 수준에 불과합니다. 책을 잘 안 보고, 사회에 기부 잘 안하는 것도 불자들이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천수경>에서 말하듯,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절대 진리인 ‘무위법’을 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한국불교의 실정은 부자 아버지가 남긴 유산 자랑만 하고, 그 유산을 세상을 위해 제대로 쓰는 실천은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여기서 무위법 유위법의 종교적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